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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대방]이제 그에게서 계주봉을 건네받자
등록일 2015-08-26
 
그곳에서 ‘파란색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까지는 그 일이 일어난 줄 몰랐다. 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인공기와 태극기 크기를 소개하던 병사에게 다급하게 무전이 들어온다. 안보견학관 앞 주차장에 차가 멈추자 그 병사는 우리 일행을 차에서 내리게 할지, 바로 부대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지 확인하겠다며 차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로부터 20분 뒤 우리는 JSA경비대대를 빠져나왔다. 북한이 서부 전선에서 기습적으로 총과 포를 쏘던 바로 그 시간, 나는 이렇게 ‘분단의 최전선’ 판문점에 머무르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가 대응 포격을 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그를 떠올렸다. 지난 8월 초 그의 방북 덕분에 남북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조금이라도 풀렸더라면 어땠을까? 북한의 지뢰도발로 우리 젊은 병사들이 안타깝게 다치는 일도, 접경 지역 주민들이 생계를 접어두고 방공호로 대피하는 일도 없지 않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더위를 유난히 못 견딘다”는 그가 90세 넘은 노구를 이끌고 한여름 방북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에 대한 미안함, 그의 방북을 남북 긴장 완화의 계기로 삼지 못한 아쉬움 등이 한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다.
 
  내 성품이 다투질 못하고 남편도 언행이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다. 크게 싸운 기억이 없다. 우리 사이에 불화가 있다면 그건 온도 차이 때문이다. 그는 추위를 못 견뎌 하는 반면 나는 더위를 유난히 못 견딘다. 그는 여름에도 냉방을 하면 내복을 입는다. 반면에 나는 겨울에도 내복을 입지 않으며 머릿속에서 땀이 흐른다. 그래서 간혹 역정을 낸다. “제발 ‘덥다’, ‘덥다’는 소리 좀 그만 해요”라고. 춥다고 하는 사람 옆에서 덥다고 하니 그럴 말도 하다. 청와대에서 대통령 수행원들은 온도를 ‘올려라’ 하고, 내 수행원들은 ‘내려라’ 하며 신경전을 오랫동안 벌였다고 한다(책 388~389쪽)
 
이희호 여사 자서전이 김대중 대통령의 그것보다 2년 먼저 나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이 여사가 자서전을 썼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김 대통령 사후 인 2010년에 출간된 김대중 자서전은 자신의 기억과 기록을 토대로 후대들에게 몇 월 며칠에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주려 애를 쓴 책, 곧 ‘역사책’ 같은 느낌을 준다. 이에 비해 이 여사의 자서전은 그가 유년기, 해방공간과 한국전쟁기, 미국 유학 시절, 미국에서 돌아와 여성인권 정립을 위해 활동하던 1960년대, 이후 김대중과 함께 헤쳐 온 30여 년, 끝으로 청와대에서 다시 동교동으로 돌아올 때까지 어떠한 심정과 생각으로 그 ‘파란곡절’을 겪었는지를 꼼꼼히 적어나간 ‘일기장’ 같은 느낌이다.
물론 이 여사의 자서전 역시 해방기와 한국전쟁 초기 그가 가담했던 청년운동과 여성운동, 1970~1980년대 야당사, 민주화 운동 등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을 담고 있다. 역사 공부를 위한 참고서로도 손색이 없다는 얘기다. 그래도 역시 이희호 자서전의 가장 큰 매력은 격동의 시절 그 자신이 간직해왔을 심정과 생각이 책 곳곳에 솔직히 담겨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큰 인물들의 자서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과장이나 치장 없이 담백하다.  한편 이 여사는 이 책에서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얼마나 큰 역사적 책임감을 느끼며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에 임했는지도 아래처럼 담담하게 들려준다. 꽤 많은 남북정상회담 관련 회고가 나왔지만, 회담 주역의 고뇌를 이보다 더 생생히 느껴지도록 해 주는 회고를 나는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했다.
 
  강행군을 마치고 5시쯤 숙소로 돌아오니 대통령은 아직 정상회담 중이라고 했다. 2시간째 계속하고 있었다. 잠시 휴식차 온 그는 많이 지쳐 보였다. 6시 전에 다시 회담장으로 갈 때는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무거운 걸음을 떼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 고독하고 힘겨워 보였다. 한동안 배웅하면서 서 있자니 눈가가 젖어왔다. 누구에게 들킬세라 나는 얼른 눈가를 훔쳤다. 막중한 책임을 진 사람은 결정적 순간에 무섭게 외롭다. 그날의 그가 결혼생활 중 만난 가장 고독한 모습이었다(책 340쪽).
 
몇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남북대치 국면이 요 며칠 정점에 도달한 듯하다. 다행히 남과 북은 8월 22일부터 24일까지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거의 쉼 없이 대화한 끝에 상호 포격으로 고조된 군사적 긴장을 극적으로 낮췄다. 이번 남북 고위급접촉에 나선 남측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홍용표 통일부 장관, 북측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김양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역시 15년 전 이희호 여사 눈에 비친 김대중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이제 남북관계를 통일을 향해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진전시켜야 할 책임,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야 할 책임은 남북 현직 당국자들의 몫이 됐다. 통일과 한반도 평화정착이라는 목표점을 향해 가는 이어달리기의 계주봉이 이희호 여사를 포함한 앞 주자들에게서 뒤 주자들에게 완전히 건네진 것이다. 모두 준비! 힘차게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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