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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방 -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 추진본부에서 보내드리는 뉴스레터입니다.

제목 [지대방]분단이 없었다면 그 가족의 아픔도 없었다
등록일 2015-11-27
 
저자는 책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짐을 짊어지고 산다. 누구의 짐이 가장 무거운지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그 내용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짊어진 짐 속을 들여다봄으로써 그 인생뿐 아니라 그와 그녀가 살아온 사회와 시대가 보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현실이 선명히 부각되기 때문이다.” 교보문고 광화문 글판 덕에 잘 알려진 시구를 통해, 시인도 같은 말을 우리에게 건넨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시 <방문객> 중에서).
 

백 번 천 번 공감한다. 우리는 역사의 조난자를 개별적이 아니라 집단적으로만, 또는 무미건조한 숫자로만 기억하는 데 얼마나 익숙해져 있던가. 그래서 고마웠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한겨레』가 희생자 숫자 보도에서 멈추지 않은 게.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기획으로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사연, 유족의 편지 등을 정성스레 소개해준 일이. 민족분단, 남북대결 역시 우리가 단지 집단적으로만, 숫자로만 기억해서는 안 될 비극을 무수히 연출해왔다. 재일조선인 양영희가 쓴 『가족의 나라』는 바로 이 집단적이면서도 개별적인 비극에 관한 책이다. 달리 말해 『가족의 나라』는 분단과 대결이 한 가족 구성원 각자에 가한 상처에 대한 이야기다.
 
양영희에게는 오빠가 셋 있었다. 클래식 음악과 영화, 연극을 좋아하는 열두 살 위 건오 오빠.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며 언제나 주변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밝은 성격의 열 살 위 건아 오빠. 그리고 나이 차이가 가장 적어 언제나 친근하게 ‘겐짱’이라 부르던 여덟 살 위 건민.  우애 좋게 자라나던 사 남매의 아픔은 조금 멀리 보면 ‘1958년 여름’ 시작된 한 사건으로 비롯됐다.
 
1958년 8월 12일 도쿄에서 열린 8·15 13주년 기념 ‘재일조선인축하대회’에서 재일조선인의 ‘집단적 귀국결의’가 채택됐다. 재일조선인 ‘귀국운동’이 본격화된 것이다. 김일성은 9월 8일에 “재일조선인의 귀국열망을 열렬히 환영한다”고 즉답했고, 이후 재일조선인의 집단적 귀국결의가 폭발적으로 확대돼 1959년 1월 당시 귀국 희망 재일조선인 숫자는 10만 명을 넘어섰다. 1959년 들어 일본 정부와 북한의 직접 교섭이 시작됐고, 그해 8월 마침내 일본 적십자사와 북한 적십자회 사이에 ‘재일조선인귀환협정’이 체결됐다(박정진, 2011, 「북한의 대일접근과 재일조선인 ‘북송(귀국)문제’」, 『북한연구학회보』 제15권 제1호, 222쪽). 이 협정에 따라 1959년 12월부터 1984년 7월까지 187회에 걸쳐 약 9만3,340명(일본인 처를 포함)의 재일조선인이 북한으로 귀국했다(박일 외, 2012, 『재일코리안 사전』, 67쪽).
 
 
재일조선인 ‘귀국운동’의 밑바탕에 일본의 차별에 의한 재일조선인의 고충이 놓여 있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재일조선인의 고충이 집단적 귀국운동 시작 직후 10만 명이 넘는 재일조선인이 귀국을 희망하고, 실제로 1984년까지 10만 명 가까운 재일조선인이 북한으로 귀국한 사실을 모두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이러한 집단적 귀국의 배경에는 재일조선인을 부담으로 여기던 일본 정부의 이해(테사 모리스 스즈키, 2008, 『북한행 엑소더스』, 책과함께), 그리고 북한 당국의 지령을 받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의 조직적 동원이 놓여 있었다. 북한은 1955년 2월 일본에 국교정상화를 공식 제안한 뒤 적극적으로 일본에 접근했다. 그런데 1958년 4월 한·일회담이 재개되고 북·일교류는 후퇴 기미를 보이자 위기의식을 느낀 북한이 국면전환을 시도한 게 바로 귀국운동이었다는 것이다(박정진, 앞의 논문). 냉전기 남북대결이 재일조선인의 북한 귀국을 ‘추동’한 셈이다.
 
오사카 지방 총련 간부였던 양영희의 아버지도 귀국운동에 적극적이었다. 마침 건아 오빠와 겐짱 모두 북으로 가서 건축가가 되겠다고 나섰고, 마침내 1971년 가을, 고등학교 1학년이던 건아 오빠, 중학교 3학년이던 겐짱이 함께 북으로 갔다. 그리고 이듬해 봄, 건오 오빠마저 귀국단으로 ‘지명’됐다. 양영희의 부모는 이미 아들 둘을 보냈으니 장남만은 지명에서 빼 달라고 총련 중앙에 탄원했지만, 끝내 건오도 북송선을 타고 떠났다.
 
조총련은 김일성 주석의 탄생 60주년 기념일인 1972년 4월 15일에 맞춰, 김병식 제1부의장의 지령 아래 열심히 북으로 선물을 보냈다. (…) 주석의 탄생 6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평양까지 오토바이로 달려가는 연출과 함께(물론 바다는 배로 건너가지만), 그걸 위한 ‘충성스런 청년축하단’ 60명이 선발되었고, 그들과 함께 조선대학교 학생 2백 명을 ‘사회주의 건설의 선봉대’로 주석님께 선물한다는 프로젝트였다. 그 2백 명 중 한 명으로 건오 오빠가 선발된 것이다. (…) 선발된 학생과 부모들은 동요했고, 그 절반인 1백 명 가까운 학생이 사퇴했다. 그리고 남은 절반을 확보하기 위해 결사적인 사상투쟁이 펼쳐졌다. (…) 누구보다 부모님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건오 오빠는 이 지명을 거부할 경우 조직 내에서 위신이 떨어질 아버지의 입장을 걱정했다. 대학 교수들은 갈까 말까 고민하는 것 자체가 조국에 대한 충성심에 그늘이 있다는 증거라며 결단을 재촉했다. (…) 건오 오빠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책 44~45쪽).
 
건오 오빠는 오픈릴 플레이어와 소형 스테레오, 베토벤과 드보르작의 레코드 십여 장을 가지고 귀국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일본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클래식 음악과 영화, 연극을 좋아하던 건오 오빠와 사회주의 혁명의 나라 북한은 그다지 어울리는 만남이 아니었다. 귀국조차 사실상 강제적이었으니 건오 오빠의 심정은 어땠을까? 결국 건오 오빠는 오랜 시간 조울증 환자로 지내다 2009년 심장발작으로 급사했다. 양영희는 자기 가족과 건오 오빠의 사연을 소개한 영화 「디어 평양」(2006)을 찍었다는 이유로 2008년부터 북한 입국이 금지된 상태라 아직 오빠의 무덤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낯선 조국’을 찾아간 건아 오빠, 겐짱의 삶도 신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건아 오빠는 바라던대로 평양 도시계획연구소에서 건축 관계 일을 했지만 그와 그의 아이들은 ‘귀포’(‘귀국동포’의 준말)에 대한 현지인들의 비난과 수군거림, 시기 어린 시선, 학교에서의 이지메, 때로는 골목길에서의 습격 등 실로 다채로운 고충을 겪으며 살아야 했다. 조국은 건오 오빠의 가족에게 기대만큼 따뜻한 품이 아니었다. 뇌종양이 생긴 겐짱은 몇 년 씩 계속된 부모의 노력(어떤 노력이었는지는 책을 직접 보시길)에 힘입어 1999년 12월 일본에 치료차 올 수 있었다. 14살 소년이 마흔 넘은 중년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애초 3개월 예정으로 일본에 왔던 겐짱은 2주도 지나지 않아 귀국명령을 받고 북한으로 돌아갔다.
 
양영희는 건아 오빠, 겐짱과도 2006년 이래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아버지도 2009년 뇌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건오 오빠와 같은 해였다. 겐짱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고 3년 뒤 아버지는 불쑥 이렇게 말했단다. “안 보내도…좋았을 것을. 그때는 나도 젊었다. 남북 관계가 어려운 시대긴 했지만……너무 순진했지.” 남북관계가 어렵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오빠들은 북한으로 갔을까? 하루빨리 양영희가 북한에 있는 건오 오빠와 아버지의 무덤(아버지의 고향은 제주도다)을 찾게 되기를, 건아 오빠와 겐짱과 해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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