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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대방]‘외국 자본가’가 체험한 북한의 변화
등록일 2015-12-29
 
김정은 제1위원장은 ‘북한의 덩샤오핑’이 될 수 있을까? 요 몇 년 동안 국내외 언론에 자주 등장한 질문이다. 풀어 말하면, 1970년대 후반 중국의 덩샤오핑이 그랬듯이, 김정은이 북한을 과감하게 ‘개혁·개방’으로 이끌 것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북한의 ‘변화’에 오랜 시간 진지하게 주목해온 연구자들 중에는 질문을 아래처럼 달리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꽤 있다. 김정은은 김정일이 ‘시작’한 개혁·개방을 진전시킬까? 후퇴시킬까?
 
김정일은 그가 체제위기를 맞아 실행한 선군정치, 곧 군대를 정치·경제 문제 해결의 전면에 세우고, 핵·미사일 개발을 통해 안보를 담보하려던 통치행태 때문에 보수적 이미지가 강한 게 사실이다. 그렇다보니 김정일이 체제위기 극복을 위해 선군정치와 더불어, 북한 역사상 가장 눈에 띄는 경제개혁·개방도 추진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은 종종 간과되곤 한다. 대표적으로 김정일은 노동자들의 생산의욕을 높이기 위해 전반적 가격과 생활비 인상을 단행했고, 공장·기업소의 자율성도 확대했다(2002. 7. 1). 북한에서는 이를 경제개혁이라는 말 대신 ‘경제관리 개선조치’라고 부른다. 또한 농산품만 거래 가능했던 농민시장을 2003년 3월부터 공산품도 사고 팔 수 있는 종합시장으로 확대·재편했다. 대외적으로는 신의주특별행정구(2002. 9), 개성공업지구(2002. 10), 금강산관광지구(2002. 11) 등을 지정해 경제특구를 통한 외자유치에 나섰다.
 
이 책은 김정일이 개혁·개방을 시도하면서 북한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정확히 ‘2002년 7월’부터 7년 동안 북한에 살았던 스위스 사업가의 눈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동안 개혁·개방에 따른 북한 사회 변화는 주로 2000년대 이후 북한을 벗어나 남한에 정착한 이들이나, 며칠 정도 북한에 머물렀던 언론인이나 여행객을 통해 알려져 왔다. 물론 이들의 증언은 아직도 많은 베일에 가려진 북한 실상을 확인하는데 유용하다. 하지만, 단 며칠 동안 주마간산 격으로 북한을 살펴본 여행객의 증언으로 북한의 변화를 심층적으로 확인하는 건 애초부터 한계가 있다. 또한 탈북자의 증언도 대부분 북한 주민의 소비가 갈수록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정도에 그치고 있어서 아쉬움이 컸었다. 이러한 표피적·단편적 정보에 만족하지 못하던 이들이라면 이 책이 더욱 더 반갑게 느껴질 것이다.
 
저자가 직접 체험한 핵심 변화는 바로 북한경제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경제주체들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바야흐로 북한에서도 ‘위에서’ 시작한 정책 변화가 경제주체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경제주체들의 생각 변화가 개혁·개방을 추동하는 순환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저자가 북한 사람들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들과 저자 사이에는 아래처럼 “넓은 간격”이 존재했다.
 
 
나는 나를 우호적으로 대해주는 많은 계층의 북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노동자, 탄광 기술자, 식품가공공장 간부, 협동농장 농부, 엘리트 학자 그리고, 고위관료들이 있었다. ‘외국 자본가’인 나와 그들 사이에는 넓은 간격이 있었다. 이익창출을 우선시하는 나의 접근방식에 대해 그들은 매우 낯설어 했다. 그들은 형제국인 사회주의 국가들 그리고, 세계식량프로그램(WFP), 유엔과 같은 외국 원조자들과의 만남에 익숙해 있었다(22쪽)
 
하지만 저자가 스위스·북한 합작제약회사 ‘평스’-평스는 2006년 ‘모란봉약국’을 시작으로 현재 평양에서 9개 약국을 운영 중인데, 이 중 2012년 8월 창전거리 최고층 아파트 단지에 개점한 ‘대동문약국’은 24시간 문을 연다-를 경영하고, 고급경영기술을 가르치는 ‘평양 비즈니스 스쿨’ 운영에 관여하며 지내던 7년 사이에, 북한 사람들은 사적 이익 추구나 자본주의 경험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도, 숨기려 하지도 않게 됐다.
 
국영기업 종사자 중에서 자신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얻은 수익의 일부를 자신이 근무하는 기업과 나누기도 했다. (…) 나는 북한의 많은 기업들과 거래를 했는데, 그 기업들 모두 국영기업이었다. 하지만, 나는 때때로, 그 기업 매니저들이 국영기업 직원으로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개인 사업가로서 일을 하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을 때가 있었다(347쪽).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부동산의 교환과 거래는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 북한 경공업성 관료인 Mr.박이 나에게 다른 사람의 더 좋은 아파트와 자신의 아파트를 교환해서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아파트를 교환하면서, 차액을 시장가치로 계산해서 지불했다고 알려주었다(348쪽).
 
북한에서는 비즈니스 교육을 받은 지도자들이 점차 전면에 나서고 있다. 내가 만났던 관리들은 자신들이 ‘소로스 재단’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 영국, 독일 등에 공부하러 가서 학위를 받았다고 말해 주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북한 외무성 고위 관료 Dr.김이다. 그는 영국에 유학을 가서 MBA과정을 마쳤다. 이 지적이고, 경력이 화려한 관료는 나와 다른 외국 기업가들에게 사업 및 투자 제안을 전문가다운 방식으로 했다. 이제 더 이상 외국 대학에서 공부한 것을 숨길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도리어, 북한 상류층의 새로운 유행이 되었다(349쪽).
 
이 책은 저자가 북한에서 사업가로 살아가며 겪었던 어려움, 기쁨, 고마움, 그 과정에서 확인한 북한의 변화에 얽힌 일화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더불어 과거와 현재의 경제상황, 대외정책, 문화적 특성, 역사인식, 여성의 지위와 역할, 교육실상, 대중교통 등 북한에 관한 다채로운 서술도 풍부하게 담겨 있다. 따라서 우리말 번역서 제목을 경제 관련 얘기만 들어있을 것 같은 인상을 주는 ‘평양 자본주의’로 정한 점은 아쉽다. 차라리 원서 제목(A Capitalist in North Korea: My Seven years in the Hermit Kingdom)을 그대로 우리말(북한의 자본가: 은자의 왕국에서 보낸 7년)로 옮겨도 괜찮았을 것 같다.
잘 알려져 있듯이 2000년대 후반 북한 정권 차원에서 후퇴시키려 했던 개혁·개방은 2010년대 들어 다시 진전 궤도에 올라섰다. 그러다 김정은이 지난 몇 년 사이 몇 차례 숙청을 단행하면서 많은 이들이 김정은에 대한 기대, 곧 그가 서양에서 교육을 받았기에 더 많은 개혁·개방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기도 했다. 앞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김정은은 김정일이 ‘시작’한 개혁·개방을 진전시킬까? 후퇴시킬까? 저자는 이렇게 대답하며 책을 맺었다.
 
북한 정부가 시행착오를 거치고 있긴 하지만, 계속해서 경제개혁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나이든 보수주의자들의 저항과는 상관없이, 북한 내부에서 비공식적인 개인 경제와 중산층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진정한 경제개혁을 하지 않고서는 북한이 살아남을 수 없다. 북한의 조선노동당과 지도부도 이것을 잘 알고 있다(3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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