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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평] ‘믿고 듣는 지성’의 통일 지혜『한국 지성과의 통일 대담』
등록일 2018-05-29




‘믿고 보는 배우’라는 말이 있다. 그 배우가 출연한 영화라면 세간의 평가가 어떻든 주저 없이 지갑을 열게 하는 배우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내게는 ‘믿고 듣는 지성’이 있다. 그 분이 쓴 책이라면 출간되자마자 찾아 읽고, 그 분의 언론기고나 강연은 놓치지 않고 읽고 들으려 애 쓴다. 진짜 팬이라면 믿고 보는 배우 단 한 명만 출연해도 극장으로 달려가는데, 심지어 믿고 듣는 지성 13명이 함께 등장하는 책이 있다면? “이게 실화냐?”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해 준 통일인문학연구단에 먼저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다.

통일인문학연구단은 3년 전에 이 책과 비슷한 『통일담론의 지성사』를 발간했었다. 이번에 나온 책은 전작과 크게 두 가지 차이점이 보인다. 먼저 지난 책은 논문을 묶은 책이라 다소 읽기 어려운 부분이 제법 있었는데, 이번 책은 대담을 묶은 책답게 전반적으로 쉽게 읽힌다. 다음으로, 지난 책에 등장한 지성 8명 중 5명이 세상을 떠난 분들인데 비해, 이번 책에 등장하는 지성 13명은 모두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그렇다보니 지난 책에서는 8명의 저자가 각 지성의 글과 말을 토대로 그들의 사유를 일방적으로 소개·해석한 데 비해, 이번 책에서는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생생한 쌍방향 토론이 독자의 이해를 한층 더 깊이 있고 쉽게 해 준다.

이번 책의 인터뷰어 11명은 통일인문학연구단 소속 교수·연구원들이고, 이들이 국내 뿐 아니라 일본, 중국, 독일 등을 직접 찾아다니며 지혜를 구한 인터뷰이는 “가장 직접적으로 남북교류와 협력의 경험들을 축적하고 재임 이후에도 통일을 위한 실천적 노력을 했던 역대 통일부장관”(임동원, 정세현, 이종석), “한반도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한국사회에 대한 냉철하고 깊이 있는 사유와 성찰을 보여주셨던 국내외 지성들”(박노자, 후지이 다케시, 서재정, 박명림, 정경모, 박문일, 박한식), “한반도의 분단극복이라는 핵심 주제에 평생 천착하면서 인문학적인 통일담론의 초석을 닦은 석학들”(강만길, 백낙청, 송두율) 등이다.

‘믿고 보는 배우’가 대부분 빼어나고 인상 깊은 연기력을 갖추고 있듯, ‘믿고 듣는 지성’은 역사의 흐름과 현안을 꿰뚫어보는 혜안과 통찰력, 정확한 예측력 등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지성들도 책 곳곳에서 이러한 지혜와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예를 들어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이미 1년 반 전에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내다봤고, 박한식 교수의 4년 전 예측은 2018년 5월 현재 ‘현실’이 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이 현상을 유지하려는 입장이라면 트럼프는 현상변경, 현상타파의 입장인 것으로 보입니다. 주한미군이나 주일미군 유지를 원한다면 한국과 일본은 유지비용을 더 내라든가 하는 말이 다 그런 생각에서 기인하는 거예요. (…) 하지만 냉전 대신 평화, 분단 대신 통일로의 변화를 원하는 우리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기회를 잘 포착 활용할 수 있는 탁월한 대통령과 정부가 필요합니다.”(임동원, 2016년 11월 15일)
 
“제가 김일성 탄생 100년 기념 행사에 참가했습니다. 그때 김정은은 아주 놀라운 연설을 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인민들이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매고 사는 상황에서는 벗어나야 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 김정은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주목합니다. 그 문제를 논외하고 경제성장과 민생 복구가 어렵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겠죠. (…) 그래서 향후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아주 집요한 노력, 정책이 있을 것입니다. (…)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는 직결되어 있습니다. 남쪽은 제외하고 북미관계만 개선한다는 것은 전략적 모순입니다. 북미/남북관계의 개선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김정은 체제의 현명한 노선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예측하고 있습니다.”(박한식, 2014년)
 
13명의 말 하나하나가 모두 새겨들을 말이기에 최대한 상세히 소개하고 싶지만, 스포일러처럼 책 내용을 옮기는 바람에 독자가 직접 책을 읽는 즐거움을 뺐고 싶지는 않다. ‘믿고 보는 배우’가 출연하더라도 한창 상영 중인 영화 줄거리를 모두 말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대신, 오랜 시간 통일을 화두로 정진·분투해 온 지성들이 이 책에서 공통적으로 들려준 지혜 몇 가지는 소개해본다. 요즘 남북관계에 주는 시사점이 크기 때문이다.

첫째, 이들은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한국이 점점 더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고,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냉전기에는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의 목소리와 영향력이 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미-중관계는 과거 미-소관계와 달리 대립과 협력이 공존하는 관계라고 볼 수 있고, 이 때문에 한국이 자주적 대북정책을 펼쳐나갈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대북정책 추진 과정에서 ‘국민의 지지’, ‘북한의 지지’, ‘국제적 지지’를 모두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조언도 소중하다.

둘째, 이들은 통일을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질 사건으로 보지 않고 ‘사실상의 통일’,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강조한다. 남북 사이에 쌓인 적대감, 정전체제 등을 해소해가는 과정 역시 통일로 봐야 하고, 법적·제도적 통일에 너무 조바심 내지 말자는 얘기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들은 한반도 평화정착을 통일의 필수 과제로 보고, 역으로 통일을 진전시켜나감으로써 한반도 평화를 공고하게 만들자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평화와 통일은 분리된 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이들은 남과 북이 서로를 경쟁대상 또는 소멸대상으로 보지 말고 상호보완적 대상, 대등한 대상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역지사지’다. 이들이 보기에 통일은 남과 북이 서로 누가 더 우월한지를 두고 싸우는 승부가 아니라 ‘입장 바꿔 생각하기’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공통점을 확대해가는 과정이다. 요컨대 통일은 남과 북의 주민들, 그리고 코리언 디아스포라가 ‘미래의 고향’을 함께 만들어가는 미래지향적 과제다.

남북 당국은 지난 4.27정상회담에서 오랜 분단과 대결을 하루빨리 종식시키고 공동번영, 자주통일, 한반도 평화정착 등 ‘새로운 시대’를 위해 함께 나아가기로 합의했다. 한편 문재인 정부는 북·미관계 개선, 한반도 비핵화의 ‘길잡이’, ‘촉진자’ 역할을 여러 장애물을 넘어서며 성과적으로 해 나가는 중이다. 이 책에 실린 대담은 2014년에서 2018년 1월 사이에 이루어졌다. 남북관계가 요즘 같지 않던 시절, 13명의 지성이 들려준 지혜는 이렇게 하나둘씩 현재 남북관계의 지침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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