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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평] 우리는 35년을 ‘함께’ 고생했다.『35년』 ⓛ, ②, ③
등록일 2018-12-26





상상해보자. 남북한 주민들이 처음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먼저 만국공통 소재인 날씨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을까? 첨예한 논쟁을 앞둔 남북한 당국자들도 처음 만나면 대부분 날씨를 소재로 덕담을 주고받는다. 날씨 이야기를 마치면 아마도 앞에 놓여 있는 음식, 함께 보고 있는 풍경 등이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그 뒤에는? 남한 주민들끼리라면 대개 영화, 드라마, 예능, 연예인, 책, 운동, 여행 이야기 등을 가볍게 주고받으며 공감대를 넓혀갈 텐데,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남한 주민들은 북한 주민들이 접하고 즐기는 영화, 드라마, 예능, 연예인, 책, 운동, 여행 등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처음 만난 사이에 어디 사는지 물은 뒤 “그 동네 아파트값 많이 뛰었죠?”라고 묻기도 그렇지 않은가.

사정이 이렇다보니 실제 만남 현장에서 이뤄지는 남북한 주민들의 대화는 많은 경우 현재 삶을 건너뛰고, 미래나 과거로 직행하는 편이다. 남북 화해‧협력이 가져다줄 것 같은 여러 이점을, 아직 화해‧협력을 본격적으로 해 본 경험이 많지 않으니 다분히 뜬구름 잡듯 이야기하거나, 고구려가 참으로 강대했고, 조상이 남겨준 민족문화유산이 참 풍부하고 자랑스럽다는 식으로 대화 방향을 잡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대화는 얼마 가지 않아 끊긴다. 서로 상대 지역에 있는 민족문화유산을 접한 적이 없어서 석굴암과 첨성대가 얼마나 근사한지, 강서대묘 사신도가 얼마나 경이로운지 잘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남한 주민들에게 비교적 익숙한 신라‧백제‧조선 시대 얘기를 북한 주민들은 잘 모르고, 북한 주민들에게 비교적 익숙한 고려 시대 얘기는 남한 주민들이 잘 모르는 탓이다. 그렇다고 ‘먼’ 과거가 아닌 ‘가까운’ 과거, 곧 분단 이후 현대사를 얘기하다가는 워낙 다툰 시간이 길었기에 감정 상할 일이 많지 않을까?

가끔 이런 상상을 할 때마다 떠올리는 게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개항 이래 민족 수난사다. 분단 이전 우리 민족이 ‘함께’ 겪었던 ‘수난의 기억’은 오랜 분단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주민들의 의식에 뚜렷하든, 희미하든 새겨져 있다. 개항 이래 광복까지가 우리 민족에게 지극히 고통스러운 시기였고, 수많은 지사들이 민족해방을 위해 희생하고 싸워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남북한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인식이 있기에 ‘일본군 위안부’, ‘안중근’처럼 남북한 사람들이 공통으로 위로하고 존경하는 인물들도 있고, 나아가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 진정 어린 반성과 사죄를 하지 않는 일본에 대한 공통적인 반감도 존재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 시대는 남북한 주민들이 함께 가슴 아프게 돌아보고, 이러한 고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인지 함께 논의하기에 좋은 시대다.

그런데 이 시대를 소재로 무리 없이 대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다. 바로 이 시대에 대한 ‘지식’ 부족이다. 과거에서 교훈을 찾으려면 일단 이 시절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충분히 아는 게 필수적인데, 남한사회에서 개항 이래 광복까지 역사는 이런저런 이유로 오랜 시간 교육의 공백지대였던 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북한사회에서는 당국이 이 시절 교육을 오래 전부터 해오기는 했지만, 김일성 일가의 항일투쟁에 치중된 교육이었다는 한계가 크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잘 진전된다면 남북 공동 역사쓰기를 통해 한반도가 어쩌다 일제 식민지가 됐고, 일제 강점기는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으며, 수난의 역사를 끝내기 위한 우리 민족의 저항이 얼마나 끈질기고 처절하게 이어졌는지를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교과서도 만들 수 있을 테고, 이런 교과서가 나온다면 남북한 사람들의 과거사 대화가 수월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북 공동 역사쓰기는 아직 시기상조고, 그렇다고 해서 개항 이래 광복까지 역사 공부를 마냥 미뤄둘 수는 없는 상황에서 남북한 사람들이 함께 읽을 만한 책은 없을까? 박시백 작가가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는 중인 『35년』은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발견한 보물 같은 책이다. 『한겨레』에 시사만화를 연재하며 명성을 얻던 박시백은 2001년 신문사를 떠나 무려 12년 동안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리는 작업에 매진했고, 마침내 2013년에 총 20권을 완간했다. 필자도 몇 년 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정독하며 500년 넘는 조선 시대사의 맥을 짚을 수 있었다. 이렇게 믿음직스러운 작가였기에 얼마 전 직장 도서관에서 그가 올해 초 발간한 『35년』 1‧2‧3권을 발견하자마자 읽었고, 지금은 그가 작업 중인 나머지 총 4권이 하루라도 빨리 출간되기를 목 빼고 기다리는 중이다.

『35년』은 1910년 8월 29일 국권 피탈에서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일제 식민지 35년 역사를 다룬 작품이다. 박시백은 이미 전작 『조선왕조실록』 19권에서 개항과 갑신정변을, 20권에서 동학운동부터 대한제국 망국까지를 그려냈다. 그러니 개항 이후 광복까지를 충실히 공부하려면 『조선왕조실록』 19권, 20권과 『35년』을 함께 보길 권한다. 박시백은 일제 식민지 『35년』을 5년 씩 총 7권으로 그려내기로 계획하고 현재까지 1권(1910~1915)에서 한‧일 강제병합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 식민지 초기 조선인의 삶과 국내외 저항, 2권(1916~1920)에서 3‧1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3권(1921~1925)에서 일제 통치 방식 변화, 국내외에서 본격화된 무장투쟁‧의열투쟁‧대중투쟁 등을 그려냈다.

3권까지 읽으며 느낀 이 책의 두드러진 장점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각 권을 시작하면서 ‘프롤로그’로 각 시대의 세계사를 요약해주고, 각 권 말미에도 세계사와 민족사 연표를 함께 제시함으로써 우리 민족사를 세계사의 맥락에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둘째, 이 책은 남한 사람들에게 그나마 알려진 ‘항일의 역사’만을 담고 있는 책이 아니다. 박시백은 이 책에서 항일의 역사만큼 ‘친일의 역사’를 소개하는데 힘을 쏟았고, 이러한 대비 덕분에 독자는 그 시절의 저항이 얼마나 더 가치 있고 뜻깊은 행위였는지를 더 잘 깨닫게 된다. 셋째, 김훈은 소설 『칼의 노래』 말미에 ‘인물지’를 넣어 전란의 시대를 돌아보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물이 이순신만이 아님을 깨우쳐줬었다. 박시백 역시 각 권별로 상세한 ‘인명사전’을 붙여 일제 강점기를 돌아보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수많은 정치인, 독립운동가, 친일파, 종교인, 예술가 등의 생애를 소개해준다. 이 덕분에 우리 기억 속의 항일투사 목록, 친일파 목록도 좀 더 풍부해질 것이다. 넷째, 3‧1독립선언서, 조선혁명선언 등 항일의 중요 고비마다 나온 사료를 각 권 말미에 첨부해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이제 또 다른 상상을 해 본다. 박시백의 『35년』이 완간되면 이 책을 북한 사람들과 함께 읽는 상상, 함께 책을 읽으며 “우리는 35년을 함께 고생했네요”라며 서로를 위로하는 상상,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이제는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평화‧번영의 길을 함께 가는 상상, 그 과정을 남북한이 이끌어가는 상상. 하루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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