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닫혀 있을 때, 평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김 동 엽
(북한대학원대학교 심연북한연구소장, 교수)
남북관계의 문이 너무 오래 닫혀 있다. 대화 채널은 끊겼고 군사적 긴장은 일상이 되었다. 평양은 이제 한국을 화해와 통일의 상대가 아니라 ‘적대적인 두 국가’,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의 상대라고 규정한다. 통일과 민족을 강조하던 기존의 언어도 지우고 있다. 남북을 이어 온 제도와 공간 역시 하나씩 정리해 왔다.
광복절 경축사에서 정부는 ‘서로 존중하는 평화공존’과 ‘싸울 필요가 없는 평화’를 제시했다. 오래된 전쟁을 끝내기 위한 당사자 간 논의도 제안했다. 평양의 반응은 차가웠다. 한미연합연습이 대폭 축소된 뒤에도 김여정 부장은 한국 정부를 향한 비난을 이어갔다. 대화를 제안하는 쪽과 들을 생각이 없다는 쪽이 마주 선 모습이다.
답답하지만 바뀐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평양이 만든 ‘적대적 두 국가’의 틀에 우리까지 들어갈 이유도 없다. 지금 필요한 질문은 “언제 대화가 시작될 것인가”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상대가 문을 닫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과 서로 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한반도에는 이미 오랜 시간 서로 다른 체제와 국가적 실체가 존재해 왔다. 그 현실을 인정한다고 통일을 포기하는 것도, 분단을 영구화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인정해야 관계를 바꿀 수 있다. 존재를 부정하면서 관계를 개선하기는 어렵다.
최근 제기되는 ‘북한인가, 조선인가’라는 국호 문제도 이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평양은 과거 우리를 주로 ‘남조선’이라고 불렀지만 이제 ‘대한민국’이나 ‘한국’이라는 공식 이름을 사용한다. 우리를 존중해서가 아니다. 같은 민족도, 통일의 상대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호명이다. 공식 이름도 적대와 단절의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도 상대를 ‘조선’이라고 불러야 할까. 굳이 하나의 정답을 만들 필요는 없다. 익숙한 표현을 강제로 바꾸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조선’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 자체를 금기시할 이유도 없다.
국호 사용은 체제에 대한 지지나 국가승인과 같은 일이 아니다. 남북기본합의서 서명란에도 양측의 공식 국호가 명기돼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외교와 공식 대화, 학술과 민간교류에서는 상대가 스스로 쓰는 이름을 존중해 부를 수 있고, 일상에서는 익숙한 표현을 쓸 수도 있다.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이름으로 부르는 상대와 어떤 관계를 만들 것인가이다.
이름은 평화의 증명서가 아니다. 다만 상대가 자기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존중해 보는 일은 관계를 다시 생각하는 작은 출발이 될 수 있다. 관계는 거창한 합의 이전에 상대를 어떻게 부르고 바라보는가에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공존 역시 통일 포기라는 오래된 이분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미래에는 하나가 되자고 말하면서 오늘 서로를 제거해야 할 적으로 대하는 것은 모순이다. 통일을 말하면서 전쟁의 위험을 방치하는 것도 이상하다. 무엇으로 통일할 것인지보다 지금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서로 해치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통일의 형태와 시기는 미래 세대의 선택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후세가 선택할 미래가 남아 있으려면 지금 전쟁하지 않는 관계부터 만들어야 한다. 평화공존은 통일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선택 가능성을 지키는 일이다.
최근 조미대화 가능성을 둘러싼 기대가 커지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신중하게 볼 필요가 있다. 조미대화가 열린다고 남북관계가 저절로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하노이 이후의 경험이 이를 보여준다. 우리의 문제를 워싱턴과 평양의 결단에만 맡겨 놓을 수도 없다.
조미대화를 기다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것부터 실천해야 한다. 지금 당장 만나기도 어렵고 합의를 만들어 내기는 더 어렵다. 연락할 수 있는 통로를 되살리는 일은 다르다. 군사분계선과 서해에서 작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 상대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신뢰가 있어서 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신뢰가 없기 때문에 소통의 채널은 더 필요하다.
대화는 상대에게 주는 보상이 아니라 오판과 충돌을 막는 안전장치다.
지금 한반도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누군가 전면전을 결심하는 상황만이 아니다. 오히려 오해와 통제되지 않는 우발적 충돌이 더 현실적인 위험일 수 있다.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작은 행동을 공격으로 오해하고 대응과 보복이 이어지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질 수 있다. 평화의 첫걸음이 정상회담보다 핫라인이어야 하는 이유다.
신뢰 역시 먼저 요구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상대의 호응을 기다리지 않고도 먼저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북측 언론·출판물과 정보통신망에 대한 접근을 여는 일, 9·19 군사합의의 복원을 기다리기보다 충돌 방지 조치 가운데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것부터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그렇다. 이산가족과 인도적 문제, 산불과 수해, 감염병과 해난사고처럼 정치적 상황과 분리해 다룰 수 있는 문제부터 통로를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작은 실천과 협력 하나가 지금의 남북관계를 단숨에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작은 협력조차 사라지면 다시 관계를 시작할 경험도 남지 않는다.
평양이 당장 응답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상대가 문을 닫았다고 우리까지 모든 문을 잠글 필요는 없다. 정부 사이의 문이 닫힐수록 종교와 시민사회의 역할은 더 중요해진다. 당장 평양에 가거나 누군가를 만나는 일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 안에서 적대를 키우지 않고, 다시 관계가 열릴 때 이어갈 수 있는 사람과 의제, 민간의 접점을 지켜내는 것도 중요한 평화 실천이다.
인도적 지원과 교류가 다시 가능해질 때를 준비하고, 대화와 협력 자체를 무의미하거나 위험한 일로 여기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것도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당장 눈에 띄는 성과는 없을 수 있다. 평화가 언제나 즉각적인 성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평화는 상대가 마음에 들 때만 선택하는 정책이 아니다.
상대가 적대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우리까지 같은 언어를 돌려줄 필요는 없다. 평양이 통일을 지웠다고 우리까지 평화를 지울 이유도 없다. 문을 닫았다고 관계의 가능성까지 스스로 없앨 필요는 더욱 없다.
평화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와도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원칙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되 적으로만 보지 않는 것, 다름을 인정하되 단절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통일을 서두르지 않되 평화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 이건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관계가 꽉 막힌 지금은 오히려 이런 작은 원칙을 지키는 일이 더 어렵다.
문이 닫혀 있을 때 평화가 할 수 있는 일은 억지로 문을 여는 것이 아니다. 다시 열 수 있는 문을 남겨 두는 일이다.
**전문가 칼럼은 민추본의 공식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문이 닫혀 있을 때, 평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김 동 엽
(북한대학원대학교 심연북한연구소장, 교수)
남북관계의 문이 너무 오래 닫혀 있다. 대화 채널은 끊겼고 군사적 긴장은 일상이 되었다. 평양은 이제 한국을 화해와 통일의 상대가 아니라 ‘적대적인 두 국가’,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의 상대라고 규정한다. 통일과 민족을 강조하던 기존의 언어도 지우고 있다. 남북을 이어 온 제도와 공간 역시 하나씩 정리해 왔다.
광복절 경축사에서 정부는 ‘서로 존중하는 평화공존’과 ‘싸울 필요가 없는 평화’를 제시했다. 오래된 전쟁을 끝내기 위한 당사자 간 논의도 제안했다. 평양의 반응은 차가웠다. 한미연합연습이 대폭 축소된 뒤에도 김여정 부장은 한국 정부를 향한 비난을 이어갔다. 대화를 제안하는 쪽과 들을 생각이 없다는 쪽이 마주 선 모습이다.
답답하지만 바뀐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평양이 만든 ‘적대적 두 국가’의 틀에 우리까지 들어갈 이유도 없다. 지금 필요한 질문은 “언제 대화가 시작될 것인가”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상대가 문을 닫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과 서로 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한반도에는 이미 오랜 시간 서로 다른 체제와 국가적 실체가 존재해 왔다. 그 현실을 인정한다고 통일을 포기하는 것도, 분단을 영구화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인정해야 관계를 바꿀 수 있다. 존재를 부정하면서 관계를 개선하기는 어렵다.
최근 제기되는 ‘북한인가, 조선인가’라는 국호 문제도 이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평양은 과거 우리를 주로 ‘남조선’이라고 불렀지만 이제 ‘대한민국’이나 ‘한국’이라는 공식 이름을 사용한다. 우리를 존중해서가 아니다. 같은 민족도, 통일의 상대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호명이다. 공식 이름도 적대와 단절의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도 상대를 ‘조선’이라고 불러야 할까. 굳이 하나의 정답을 만들 필요는 없다. 익숙한 표현을 강제로 바꾸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조선’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 자체를 금기시할 이유도 없다.
국호 사용은 체제에 대한 지지나 국가승인과 같은 일이 아니다. 남북기본합의서 서명란에도 양측의 공식 국호가 명기돼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외교와 공식 대화, 학술과 민간교류에서는 상대가 스스로 쓰는 이름을 존중해 부를 수 있고, 일상에서는 익숙한 표현을 쓸 수도 있다.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이름으로 부르는 상대와 어떤 관계를 만들 것인가이다.
이름은 평화의 증명서가 아니다. 다만 상대가 자기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존중해 보는 일은 관계를 다시 생각하는 작은 출발이 될 수 있다. 관계는 거창한 합의 이전에 상대를 어떻게 부르고 바라보는가에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공존 역시 통일 포기라는 오래된 이분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미래에는 하나가 되자고 말하면서 오늘 서로를 제거해야 할 적으로 대하는 것은 모순이다. 통일을 말하면서 전쟁의 위험을 방치하는 것도 이상하다. 무엇으로 통일할 것인지보다 지금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서로 해치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통일의 형태와 시기는 미래 세대의 선택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후세가 선택할 미래가 남아 있으려면 지금 전쟁하지 않는 관계부터 만들어야 한다. 평화공존은 통일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선택 가능성을 지키는 일이다.
최근 조미대화 가능성을 둘러싼 기대가 커지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신중하게 볼 필요가 있다. 조미대화가 열린다고 남북관계가 저절로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하노이 이후의 경험이 이를 보여준다. 우리의 문제를 워싱턴과 평양의 결단에만 맡겨 놓을 수도 없다.
조미대화를 기다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것부터 실천해야 한다. 지금 당장 만나기도 어렵고 합의를 만들어 내기는 더 어렵다. 연락할 수 있는 통로를 되살리는 일은 다르다. 군사분계선과 서해에서 작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 상대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신뢰가 있어서 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신뢰가 없기 때문에 소통의 채널은 더 필요하다.
대화는 상대에게 주는 보상이 아니라 오판과 충돌을 막는 안전장치다.
지금 한반도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누군가 전면전을 결심하는 상황만이 아니다. 오히려 오해와 통제되지 않는 우발적 충돌이 더 현실적인 위험일 수 있다.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작은 행동을 공격으로 오해하고 대응과 보복이 이어지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질 수 있다. 평화의 첫걸음이 정상회담보다 핫라인이어야 하는 이유다.
신뢰 역시 먼저 요구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상대의 호응을 기다리지 않고도 먼저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북측 언론·출판물과 정보통신망에 대한 접근을 여는 일, 9·19 군사합의의 복원을 기다리기보다 충돌 방지 조치 가운데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것부터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그렇다. 이산가족과 인도적 문제, 산불과 수해, 감염병과 해난사고처럼 정치적 상황과 분리해 다룰 수 있는 문제부터 통로를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작은 실천과 협력 하나가 지금의 남북관계를 단숨에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작은 협력조차 사라지면 다시 관계를 시작할 경험도 남지 않는다.
평양이 당장 응답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상대가 문을 닫았다고 우리까지 모든 문을 잠글 필요는 없다. 정부 사이의 문이 닫힐수록 종교와 시민사회의 역할은 더 중요해진다. 당장 평양에 가거나 누군가를 만나는 일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 안에서 적대를 키우지 않고, 다시 관계가 열릴 때 이어갈 수 있는 사람과 의제, 민간의 접점을 지켜내는 것도 중요한 평화 실천이다.
인도적 지원과 교류가 다시 가능해질 때를 준비하고, 대화와 협력 자체를 무의미하거나 위험한 일로 여기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것도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당장 눈에 띄는 성과는 없을 수 있다. 평화가 언제나 즉각적인 성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평화는 상대가 마음에 들 때만 선택하는 정책이 아니다.
상대가 적대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우리까지 같은 언어를 돌려줄 필요는 없다. 평양이 통일을 지웠다고 우리까지 평화를 지울 이유도 없다. 문을 닫았다고 관계의 가능성까지 스스로 없앨 필요는 더욱 없다.
평화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와도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원칙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되 적으로만 보지 않는 것, 다름을 인정하되 단절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통일을 서두르지 않되 평화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 이건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관계가 꽉 막힌 지금은 오히려 이런 작은 원칙을 지키는 일이 더 어렵다.
문이 닫혀 있을 때 평화가 할 수 있는 일은 억지로 문을 여는 것이 아니다. 다시 열 수 있는 문을 남겨 두는 일이다.
**전문가 칼럼은 민추본의 공식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